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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불복종: 직접 행동이 왜 필요한가

글: 렉스 웨일러

2014년 2월 24일, 그린피스 국제본부 쿠미 나이두 사무총장(당시)은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 마틴 스쿨에서 시민 불복종에 대해 강의했습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약자가 강자에 맞설 때, 시민 불복종이 불가피했던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대부분 사례에서, 균형을 잃은 권력 앞에서 시민이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전략 중 하나가 바로 불복종입니다. 

2000년 전, 로마 제국은 유대 땅을 점령하고 괴뢰정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유대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신전 곳곳에 로마의 상징물을 세웠죠. 로마는 저항하는 자들을 죽이고 공공연히 폭력을 사용하며 사람들을 겁박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공동체는 해안가에 위치한 시세리아로 행진했습니다. 로마 총독에 대항하는 평화적인 저항 시위였죠. 남자와 여자, 어린이들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한 것입니다. 이 평화로운 행진은 로마인들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유대인들이 힘으로 맞서지 않았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로마가 가진 무력도 쓸모없는 것이 됐죠. 로마는 결국 신전에서 그들의 상징물을 철거했습니다. 

그렇게 약자는 강자에 대항해 왔습니다. 퀘이커 교도, 간디, 치코 운동, 여성참정권, 노동 운동, 마틴 루터 킹, 로자 파크스, 코리건 마기르, 넬슨 만델라, 아웅산 수치, 그린피스 등등 무수한 사례가 있죠. 말뿐 아니라 평화적 저항으로 사회는 변화해 왔습니다.

1846년 미국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인두세 납부를 거부했습니다. 미국이 멕시코를 상대로 일으킨 전쟁과 노예제도에 반대했기 때문이었죠. 경찰이 소로를 체포한 후, 동료 랄프 왈도 에머슨은 감옥으로 찾아가 소로에게 물었습니다. “헨리, 여기서 뭐하는 겐가?” 에머슨이 노예제와 전쟁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소로는 그에게 되물었습니다. “왈도, 자네는 거기서 뭐하는 겐가?”

도덕적 신념은 행동을 요합니다. 시민들이 정부, 제국, 은행가, 왕족, 기업의 부당함에 저항할 때, 그들의 상대는 부조리를 이용해 이득을 얻는 자와 권력을 이용해 불공정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자들입니다. (1)그들은 자본을 독점하고, (2)경찰, 군대를 비롯한 합법적 물리력과 사법제도를 장악하고, (3)언론을 통제하고, (4)첩보 활동을 통한 정보력을 지니고, (5)협박과 회유, 또는 돈을 이용해 대중의 지지를 얻습니다. 이러한 관행은 고대 왕국부터 민주주의의 탈을 쓴 현대의 권력까지 공통적으로 보이는 모습이죠.

이런 상황에서 상대적 약자는 상대의 힘을 피하고, 자신의 약점을 감추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제한된 대중의 힘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동시에 문제(평화, 여권, 생태, 경제정의)를 조명해야 하죠. 

돈과 제도적 힘을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시민들에게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1)도덕적 진실과 정의 (2)동지와 뜻을 같이하는 수많은 사람들 (3)창의성 (4)공동체가 지닌 진정한 자산 (5)도덕적 리더십 (6)사심 없이 도덕적 진실을 추구하겠다는 약속 (7)개개인이 지닌 저마다의 이야기가 시민들의 무기입니다.

이 마지막 도구, 이야기의 힘은 식민주의자, 약탈자, 압제자들의 기만적 이야기를 폭로하는 데 이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 잘 나가는 기업들이 떠벌리는 이야기에는 경제적 정의라는 망상뿐 아니라 기후 위기를 부정하는 세력의 노골적인 속임수도 포함돼 있습니다. 지구온난화를 유발하는 탄화수소 경제로 돈을 버는 부유한 기업가들이 그들에게 돈을 대죠. 따라서 약자들, 대중은 이 제도적 힘을 상쇄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시위자들이 미국 콜로라도주 록키 플랫 핵무기 제조 공장으로 들어가는 철로에 진을 치고 있다.

노예제도, 젠더 편견, 생태적 파괴의 도덕적 부당함과 같은 부조리를 단순히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러한 부조리가 큰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강압적인 정권에게 논리적 또는 도덕적 진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오늘날 과학자의 99.9%는 아주 간단하게 지구온난화를 생물물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나가는 기업들은 진실을 부정할 그럴싸한 증거를 얻기 위해 0.1%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이 한 줌의 과학자들에게 돈을 대는 것은 대부분 석유 자본이죠.

따라서 전술은 논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대중의 격렬한 호응이 있을 때, 진실은 힘을 발휘합니다. 인도의 간디, 남아공의 만델라, 오늘날 전지구적 생태 위기 현장에서 그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도덕적, 생물물리학적 진실이 중요합니다.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활동가들은 진실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대규모 대중 담론으로 만들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남이 아닌 자신들의 이야기를 원합니다. 그 이야기에는 드라마, 캐릭터, 만남, 눈에 보이는 헌신이 담겨야 합니다. 간디가 바닷가에서 소금을 만들고, 로자 파크스가 버스 좌석을 백인에게 양보하기를 거부하고, 퀘이커 교도가 핵 실험 지역으로 보트를 몰고 가고, 그린피스가 포경선이나 북극 석유 시추 현장으로 달려드는 모습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까닭입니다.

그린피스가 1970년 첫발을 뗐을 때 사람들은 이미 수십 년 동안 생태학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레이첼 카슨이 쓴 <침묵의 봄>이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아직 대규모 움직임은 없었지요. 그린피스는 생태 운동을 지구적 규모로 일으키고 싶었습니다. 생태학적인 설명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우리는 독성물질의 위험이나 멸종 위기에 대해 설명하는 글을 쓰는 대신 커다란 대중 담론의 장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그린피스는 현재의 이야기가 가진 문제를 드러내는 새로운 서사를 만드는데 힘을 보태야 했습니다. 산업, 금융, 지배력을 가진 세력은 그들이 지닌 힘으로 ‘부를 창출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상 그들이 한 행동은 우리의 생태계와 공동체가 가진 진정한 부를 파괴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똑똑히 보여줘야 했습니다. 인류뿐 아니라 모든 생명을 위하여, 공감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을요. 산업 세력의 논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보여주고, 자연의 흐름을 따르는 조금은 겸허한 세상의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1970년대 우리는 우리가 제대로 된 길에 들어섰다고 생각했습니다. 생태적 균형의 중요성과 도덕적 진실에 도달했다고, 아니 최소한 근접했다고 여겼죠. 그러나 장기적인 사회의 안전을 위해서는 생태계의 생산성을 보호해야 합니다. 산업주의는 매우 적나라한 생물물리적 한계에 직면했습니다. 그 한계가 달가운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진실입니다.

말로만 하는 생태주의를 벗어나, 1975년 우리는 필리스 콜맥이라는 작은 어선을 타고 러시아와 일본의 포경선이 활개치던 바다로 갔습니다. 우리는 포경선을 가로막았고 살육의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했습니다. 고래의 피와 내장이 흥건한 바다, 고래를 지키려는 용감한 젊은 남녀, 산업적 약탈로 얼룩진 부패한 시스템을 담은 사진이었죠.

드디어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했습니다. 현대적 환경운동을 탄생시킨 것은 우리의 논리가 아니라, 비폭력 직접행동으로 전달한 우리의 진실한 이야기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팩트가 아니라 파괴적이고 용감한 이미지에 호응했습니다. 이야기가 도덕적 진실을 시대의 정신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비폭력 직접행동의 목적이죠.

우리가 논리와 예의로 돌아가는 사회에 살았다면 이러한 행동은 필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곳이 아니죠. 이 세상은 전세계 1%의 엘리트가 축적한 돈과 힘이 대부분의 인간과 자연에 해를 끼치는 곳입니다.

북대서양에서 젬호의 핵폐기물 해양 투기를 막아서는 그린피스 활동가들.

약 10미터 규모의 화물선 젬호는 핵폐기물 운반선으로 조업 중이었습니다. 1978년 7월 11일 그린피스의 레인보우워리어호는 투기 현장인 비스케만 근처까지 젬호를 추적했습니다. 현장에 도착하자 젬호는 속도를 2노트로 낮추고 폐기물이 든 검은 드럼통을 바다에 떨어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린피스는 작은 보트를 띄워 드럼통을 떨어뜨리는 곳으로 보냈고 이 과정을 모두 레인보우워리어호에서 촬영했습니다. 272킬로그램짜리 드럼통이 그린피스 보트 위로 떨어지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죠. 그리고 런던으로 돌아와 그린피스 활동가가 위험에 처했던 이 장면을 사람들에게 공개했습니다. 사람들은 영국원자력청에 시정을 요구했고, 원자력청은 드럼통에 담긴 것이 강력한 독성물질인 플루토늄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비폭력 직접행동으로 그들의 거짓을 폭로하고 규제기관이 법을 집행토록 한 것입니다. 직접행동이 없없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그린피스는 신체적인 폭력이나 재산상의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종 속임수나 더딘 변화의 속도 앞에 좌절합니다. 그럴 때면 셰익스피어 <율리우스 시저> 3장에 등장하는 낙담한 마크 안토니의 대사를 떠올리곤 합니다. 

O, pardon me, thou bleeding piece of earth,
That I am meek and gentle with these butchers!

오, 용서하소서, 피흘리는 대지여.

이 도살자들에게 인내하는 점잖은 저를!

 

그러나 아무리 그런 상황이 되풀이되더라도 우리는 참고 온화하게 행동합니다. 그린피스는 40년 넘게 평화로운 직접행동 원칙을 지켜 왔습니다. 도덕적 진실이 담긴 이야기를 전할 때 절대로 폭력적인 수단을 써서는 안 됩니다. 직접 행동의 영향력은 거기서 나옵니다. 우리가 아는 도덕적 진실이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승리의 가능성은 평화와 함께할 때 생겨납니다. 공감에서 우러나온 직접행동은 돈이나 폭력적 수단으로는 불가능한 큰 영향력을 가집니다.

평화적인 시민 불복종을 체포와 무력으로 과잉진압하는 것은 자신들의 도덕적 실패를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2013년 러시아 정부는 남극 해양보호 활동가 30명을 체포하고 그들을 해적 행위로 고발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러시아가 얼마나 편협하고 부패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줄 뿐이었죠. 이듬해 2월 러시아 경찰이 펑크 밴드 Pussy Riot의 멤버를 채찍질했을 때 온 세상이 그들의 잔인함을 목격했습니다. 24시간 후 밴드는 “푸틴이 너에게 사랑하는 법을 알려줄 거야”라는 곡의 뮤직비디오에 해당 폭행 장면을 담아 공개했습니다. 시민 불복종에 과잉진압으로 대응한 권력층의 도덕적 진실 부재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죠.

나는 직접행동으로 인해 투옥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조롱과 협박, 감시를 당했지만 그 시간이 내게는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입니다. 그때 나는 알았습니다. 내게 폭력과 돈의 힘을 무력화할 힘이 있다는 사실을요. 그때가 바로 나의 작은 행동으로 불의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입니다. 기득권자들의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산업과 기업들의 폭력성을 폭로할 힘이 내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이 새로운 이야기가 국제적 담론이 되는 것을 투옥, 폭행, 탄압 같은 폭력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 대응은 권력의 부패를 드러낼 뿐이죠. 이는 간디와 퀘이커 교도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우리는 로자 파크스와 넬슨 만델라로부터 그 사실을 배웠습니다.

논리와 상식, 예의만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직접행동은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도덕적 논리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사가 말해줍니다. 우리의 삶에서 도덕과 논리가 살아 있게 하려면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더 정의로운 세상을 원한다면 직접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실은 묻히고 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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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렉스 웨일러는 그린피스 재단의 창립 이사이자 그린피스 재단 최초의 뉴스레터 편집자로, 1979년 국제 그린피스를 공동 창립했습니다. 그의 칼럼은 활동주의와 환경주의에 뿌리를 두고 그린피스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전적으로 본인의 견해에 입각해 집필합니다. 트위터와 개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