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페인 소식

Greenpeace Korea | 그린피스

참여하기

최신소식 일반
9분

사회적 타성: 변화는 왜 이렇게 어려운가?

글: 렉스 웨일러

지난 수십 년간 대중 생태 담론에서 계속돼 온 질문이 있습니다. 

‘이토록 많은 증거, 과학의 경고,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사태, 셀 수 없이 많은 생태계 붕괴 사례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왜 이토록 변화에 굼뜬 것인가?’

경제 및 인구 규모의 기하급수적 증대에 관한 <성장의 한계> 연구가 발표되고 50년이 흘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인구와 소비의 성장을 늦추는 데 실패했습니다. 유엔이 인구 문제의 심각성을 처음 제기한 것이 반 세기 전인데, 우리는 아직 이 문제를 논의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옥신각신하고 있죠. 앨리스 해밀턴이 <위험 직업 연구>를 쓴 지 80년,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을 펴낸 지 6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환경과 우리의 몸에 해로운 물질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두 세기 전부터 온실 효과를 알고 있었음에도, 그리고 지난 41년간 33차례의 국제 기후 회담을 열었음에도, 탄소 배출량은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변하지 않는 걸까요?

인간이라는 생물종으로서, 그리고 다양한 사회를 구성하는 존재로서, 우리는 마치 간단한 숙제를 미루는 미성숙한 학생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다기 보다, 거대한 집단으로서 인류가 그렇게 행동하죠.

거대하고 복잡한 시스템은 개인보다 훨씬 복잡하게 작동합니다. 상호작용하는 사회로 이뤄진 수십억 명의 인류가 그렇습니다. 이러한 복잡성에서 우리의 질문, 세상이 왜 이렇게 느리게 변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일부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에는 우리가 습관을 빠르게 바꿀 수 없게 만드는 내재적인 특질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흔히 그것을 ‘사회적 타성’이라고 부릅니다. 변화를 가로막는 내재적 저항력이죠.

사회적 타성이란 무엇일까요?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엉뚱한 곳을 헤매다

‘타성’이라는 용어는 물리학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17세기 과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물질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쓴 말로, 다른 힘을 받을 때까지 현재의 운동을 지속하려는 물질의 성질을 뜻합니다. 케플러는 이 용어를 라틴어 ‘이네르템(inertem)’에서 빌려 왔습니다. ‘기술이 없다’는 뜻인데, 기량이 없어 행동할 수 없다는 의미죠.

이 개념은 사회와 행동주의의 가치를 논할 때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가해지는 힘이 없다면, 사회는 변화를 거부하고 종래의 방식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갖습니다. 사회나 개인적 맥락에서 ‘타성’이라는 말은 변화를 어렵게 만드는 고정된 습관, 의례, 양식을 얘기할 때 사용됩니다. 위험이 눈앞에 닥쳐와도 우리는 좀체 변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죠.

우리는 생태과학을 통해 ‘변화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변화에 뒤따르는 거대한 노력을 어떻게 조율할 수 있을까요? 생태적 위기는 전 지구적 딜레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는 수없이 많은 문화, 종교, 정치적 이해, 개인적 호불호, 역학 관계, 공동체, 이웃, 가족, 그리고 너무나 다양한 개인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노력으로 중국의 강을 되살리고, 호주의 멸종위기종을 구하고, 캐나다의 탄소 배출을 줄이고, 남아프리카의 하구를 보존하는 사례를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전 지구적 관점에서 보면 얘기가 다릅니다. 해마다 상수원은 고갈되고, 생물다양성은 파괴되고,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증가하고, 습지 서식지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숲은 줄어들고 사막은 넓어지고 있죠. 바다새는 사라지고, 해양 플라스틱 쓰레기는 늘어만 갑니다.

이러한 현실은 생태학자들을 무척 우울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뤄낸 승리, 성공 이야기, 희망으로 서로를 북돋웁니다. 하지만 남모르게 비관적인 생각에 빠질 때가 많죠. 글로벌 사회의 타성은 어떻게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가로막고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논하기 전에 ‘사회적 타성’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사회적 타성의 계량화

대중의 타성은 사회가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업은 ‘친환경’ 이미지를 갖고 싶어하지만 그것을 위해 수익을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개인은 ‘보다 지속가능한’ 삶을 바라지만, 지속불가능한 시스템 속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 갇혀 있다고 느낍니다. 몇몇 국가는 자국 기업이 특허로 벌어들이는 이득을 지키기 위해 생태적 복원에 반대되는 행동을 합니다. 변화에 찬성하는 국가들도 계속 지원을 받기 위해 타협하고 말죠. 심지어 환경 단체들도 변화 앞에 머뭇거릴 때가 있습니다. 후원자들이 위기의 규모와 심각성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 지구적 생태계의 건강과 야생 세계의 안녕을 고민하고 걱정하기에는 삶을 유지하는 일에 너무 바쁘죠.

이 모든 제약이 모여 우리가 사회적 타성이라고 부르는 상태를 만듭니다.

최근 이러한 타성의 한 측면을 계량화하려는 과학적 시도가 이뤄졌습니다. 지금까지의 경제 성장의 총량을 이용한 연구죠. <현재의 에너지 수요를 억제하는 과거 경제 생산량>(티모시 가렛, M.그라셀리, S.킨, 플로스 원 등. 2020년 8월 27일)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논문인데 과거의 전 세계적 경제 성장이 현재의 경제 개발을 실제로 어떻게 억제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또 과거의 경제 성장이 기후변화 경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태계와 인권 문제에 대응하려는 시도를 어떻게 제약하고 있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이 논문이 미적분 공식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에 양해를 구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하고 느끼는 사람이 많겠죠. 하지만 간단히 결론만 읽어 봐도 됩니다. 이 연구가 어떤 의미이고 타성에 관한 담론에서 왜 중요한지 설명하기 위해서, 논문의 저자들이 수행한 이전 연구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자들의 2012년 논문 제목은 <사면초가? 기후변화 경감과 경제적 번영의 딜레마>입니다. 유타 대학 대기과학부 소속의 가렛은 이 논문을 통해 탄소 배출량이 경제 활동과 완벽하게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습니다. 전 세계가 태양광과 풍력 에너지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경제 활동의 성장 속도는 재생가능 에너지원의 확대 속도를 훨씬 능가합니다. 그 결과, 탄소 배출은 계속 늘어났죠.

가렛의 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가 1달러(1990년 불변가치 기준)의 경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9.7밀리와트의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에너지 소비로 경제 활동이 가능하지만, 그 경제 활동은 화석 에너지로 인한 내재 비용을 수반하죠. 탄소 기반의 에너지가 내재돼 있다는 얘기는 심지어 재생가능에너지 인프라(자원 채굴, 운송, 시멘트와 철강 생산, 산업 제조)에도 화석 연료가 사용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결과 전 세계적으로 경제 성장과 탄소 배출을 분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세계 무역은 경제의 이러한 측면을 모호하게 만듭니다. 일례로 미국이나 유럽의 특정 지역은 경제 성장의 탄소 비용을 낮출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탄소집약적 산업(제조업, 철강 생산, 시멘트 제조, 광업 등)을 아시아나 남미, 아프리카로 이전한 결과죠. 즉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은 경제 성장과 발맞춰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를 경감하는 방법은 배출량을 줄이는 것밖에 없습니다. 국가나 지역 단위의 탄소 배출량은 전 지구의 대기 상태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2020년 논문에서 가렛을 비롯해 캐나다 맥마스터 대학의 마테우스 그라셀리, UCL의 스테판 킨 등은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1980년부터 2017년까지 38년에 걸친 통계를 이용해, 그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에너지와 과거 경제 활동의 총량이 비례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에너지 수요와 경제 성장을 떼 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첫 번째 연구 결과입니다. 이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과거의 모든 경제적 성장과 혁신을 축적한 활동을 에너지 수요와 결코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소수의 전문가들만 이해하는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생태적 위기를 이해하고 그것에 대응하는 세계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사실이죠. 해당 연구는 사회적 타성의 중요한 측면을 계량화했다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의 문명들도 그 규모와 복잡성이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을 넘어설 때마다 이러한 딜레마에 부딪혔습니다. 제국은 다른 나라의 땅을 빼앗기 위해 군대를 모으고 자원을 긁어모았습니다. 하지만 곧 그 대가가 얻을 수 있는 땅보다 크다는 것을 알게 되곤 했죠. 1981년 <진화 경제학>을 쓴 생태학자이자 시스템 이론가인 케네스 볼딩은 이를 “제국주의는 제국을 가난하게 만든다”고 표현했습니다. 성장은 결코 볼딩이 말한 제국 확장의 ‘신진대사 비용’을 보상해 주지 않습니다. 그 부채는 결국 사회적, 생태적 쇠퇴의 원인이 되죠.

마이크 라이언 박사는 세계보건기구와 함께한 최근 화상 연설에서 이러한 사회적 부채와 쇠퇴를 코로나19 팬데믹과 연결해 설명했습니다. 그는 “경제 성장은 악성 종양”이 됐다며 “지속불가능한 단계로 들어섰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죠. “우리는 부도 수표를 남발하고 있다. 그것은 점점 더 켜져 우리 아이들이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공동체보다 이익을 앞세우지 않는 세상이 필요하다.”

핀란드에서 가장 큰 고대 삼림 지역 중 하나인 프우라카이라숲의 식물. 이 숲의 수목 이끼는 겨울철 순록의 가장 중요한 먹이 공급원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생태학자들은 우리가 처한 현실의 무게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절망할 시간은 없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생태적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도전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2020년 가렛 논문에 관한 온라인 토론에서, 콜로라도 건강 공동체를 위한 시민모임의 사무국장인 나타샤 레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화적 타성을 계량화했으니, 이제 그것을 멈추게 만들 (문화적, 경제적, 환경적) 저항을 계량화해야 한다.”

사회적 행동주의는 사회의 타성을 누그러뜨리고 그것의 방향을 바꿀 저항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 타성은 인권 신장, 국제 평화, 사회 정의, 그리고 생태주의의 걸림돌이 돼 왔죠.

최근 몇십 년간, 국제 사회는 기술로 생태적 위기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해 왔습니다. 일례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IPCC)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미래의 탄소 포집 기술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탄소 배출과 경제 성장의 균형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오늘날까지 이 방법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미래의 기술적 해법은 우리가 경제 성장을 계속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적 전망을 안겨줍니다. 우리는 지금의 생활 방식을 바꾸지 않고도 생태적, 인도주의적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상상하죠.

하지만 에너지와 경제에 관한 연구들, 그리고 우리 자체의 우울한 추적 기록은 우리가 문제의 근원을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기후위기, 생명다양성 붕괴, 독성 물질, 인도주의적 위기는 보다 큰 문제의 증상입니다. 그 문제는 바로 생태적 과잉, 생물물리학적 성장의 한계죠. 성공적인 생물종이 과도하게 서식지를 넓히는 것은 공통된 특성입니다. 지금 인류가 전 세계를 점유하고 있는 것처럼요. 하지만 생태적 과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규모의 축소가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끝없는 경제 성장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합니다. 슬프게도, 대다수 사람들은 성장을 되돌리는 것을 해결책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일부 환경운동가들도 그렇죠.

최근의 연구는 경제 성장과 생태적 쇠퇴의 부정할 수 없는 연관성을 보여줍니다. 생태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늦어도 1972년 <성장의 한계> 연구가 발표됐을 때부터 생태계의 한계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계산했을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기술이 더 이상 생태적으로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의 기술은 인간의 영향을 가속화했습니다. 1980년대 컴퓨터가 종이를 덜 쓰게 만들 거라고 했던 얘기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우리는 컴퓨터가 처음 등장했을 때보다 여섯 배나 더 많은 종이를 쓰고 있습니다. 성장은 효율성을 집어삼킵니다.

내 커뮤니케이션 멘토 중 한 사람은 오래 전 나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사람들이 미처 듣기도 전에 생태적 메시지를 반복하느라 질리게 될 거라고요. 그는 메시지의 지루함과 피로를 극복하고 새롭고 깊게 소통하는 법을 찾으라고 충고했습니다. 아, 정말 그런 방법을 찾아야 했지요!

내 생각에 교훈은 이것 같습니다. ‘참고, 포기하지 말고, 계속 소통하고 행동하라.’ 오래 걸릴 수 있지만, 포기해선 안 될 일입니다. <주역>에 나와 있듯이, “인내해야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린피스 후원하기

저자 소개

렉스 웨일러는 그린피스 재단의 창립 이사이자 그린피스 재단 최초의 뉴스레터 편집자로, 1979년 국제 그린피스를 공동 창립했습니다. 그의 칼럼은 활동주의와 환경주의에 뿌리를 두고 그린피스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전적으로 본인의 견해에 입각해 집필합니다. 트위터와 개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